제3편
정보시스템팀의 맥 스튜디오 세 대가 처음으로 팀 밖으로 나간 기록이다. 최정보 팀장의 성공사례 발표에서 시작해, 다섯 부서가 맡긴 시범 사업과 석 달 뒤의 결과 보고까지를 적는다.
연구소장의 메일을 받은 지 3주 뒤, 목요일 오후 2시. 본관 대회의실.
연구소 하반기 성과공유회. 부서장 열두 명과 연구소장이 앞줄에 앉았다. 발표 순서표의 다섯 번째 줄에 처음 보는 제목이 있었다.
5. 폐쇄망에서 AI로 개발하기: 2,847만 원으로 시작한 두 달 (정보시스템팀 최정보)
정보시스템팀 다섯 명은 맨 뒷줄에 나란히 앉았다. 이코딩 주무관이 속삭였다.
"팀장님, 어제 리허설 때 세 번 틀리셨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안 틀리겠지." 박개발 사무관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볼펜을 계속 딸깍거렸다.
최정보 팀장이 단상에 올랐다. 첫 화면에는 숫자 하나만 있었다.
12
"두 달 전, 우리 팀 앞에 밀려 있던 요청 건수입니다. 인력은 여섯 명입니다. 계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앞줄에서 몇 사람이 웃었다. 그 열두 건 중 다수가 그 자리에 앉은 부서장들이 보낸 것이었다.
팀장은 화면을 넘겼다. H1001 서버 견적, NVIDIA2 서버 군, 그리고 M5 Ultra 탑재 맥 스튜디오 세 대. 왜 인터넷 AI를 쓸 수 없었는지, 왜 연구소 안에 머리를 두었는지, 왜 이클립스3를 내려놓았는지. 그는 기술 이름을 거의 말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 이야기를 했다.
"12년 차 개발자가 혼자 붙들고 있던 급여 계산 코드를, 이제 팀 전체가 읽을 수 있습니다. 개발기4를 사려다 메모리 값이 두 배가 되어 포기했고, 대신 테스트기5에서 함께 일하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 소장에게 올렸던 김전산 주무관의 표를 띄웠다.
두 달 동안
- 밀린 요청 12건 중 9건 처리
- 월요일 첫 응답 40초 → 3초
- 추가 장비 구매 0원
- 연구소 밖으로 나간 코드 0줄
"마지막 줄을 가장 자랑하고 싶습니다." 팀장이 말했다. "AI가 쓴 코드도, 우리가 읽고, 우리가 책임지고, 연구소 안에서만 돌았습니다."
마지막 화면은 한 문장이었다.
AI가 일을 대신한 게 아니라, 우리가 미뤄 둔 일을 할 시간이 생겼습니다.
박수가 끝나자 질문이 이어졌다.
환경연구부 김환경 부장이 먼저 손을 들었다.
"개발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연구원들은 코드를 안 짭니다. 매달 측정 결과 보고서를 쓰느라 이틀씩 날립니다. 그 맥 스튜디오가 그것도 됩니까?"
"해 보지 않았습니다." 최정보 팀장은 솔직하게 답했다. "다만 머리는 같습니다. 코드를 쓰던 머리에 보고서 문장을 맡겨 볼 수는 있습니다."
조사연구부 이조사 부장이 이어 물었다. 현장조사 기록을 사무실에서 다시 옮겨 치는 일이었다. 데이터연구부 박데이터 연구관은 소장님이 수시로 묻는 숫자 이야기를 꺼냈다. 연구지원부 한지원 과장은 하루 서른 통씩 오는 연구비 규정 문의 전화를, 공동장비실 윤장비 연구사는 영어 매뉴얼 800쪽짜리 낡은 분석 장비를 이야기했다.
질문이라기보다 하소연이었다. 회의실 공기가 조금 들떴다.
연구소장이 손을 들어 정리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지금 말씀하신 다섯 가지를 정보시스템팀에 시범 사업으로 맡기겠습니다. 기간은 석 달. 결과는 다음 분기 운영회의에서 보고받겠습니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보고해도 됩니다." 소장은 최정보 팀장을 보았다. "되겠습니까?"
팀장은 맨 뒷줄을 한 번 보았다. 다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겠습니다."
발표회가 끝나고. 본관 복도.
박개발 사무관이 팀장 옆으로 다가갔다.
"팀장님, 목소리 떨리던데요."
"끝까지 안 틀렸잖아." 최정보 팀장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런데 다섯 개를 받아 왔네. 우리 원래 일도 있는데."
"원래 일은 Continue6가 반쯤 하잖아요." 이코딩 주무관이 말했다.
김전산 주무관은 수첩에 다섯 줄을 적고 있었다. 부서 이름, 요청한 사람, 그리고 맡을 사람.
1. 환경연구부 측정 결과 보고서 초안 김환경 부장 → 김전산
2. 조사연구부 현장조사 기록 정리 이조사 부장 → 이코딩
3. 데이터연구부 말로 묻는 과제 현황 박데이터 연구관 → 정시스템
4. 연구지원부 연구비 규정 길잡이 한지원 과장 → 박개발
5. 공동장비실 장비 오류 로그 해석 윤장비 연구사 → 정운영
최정보 팀장이 그 수첩을 들여다보고 한 줄을 덧붙였다.
원칙: 숫자는 시스템이, 문장은 AI가, 판단은 사람이.
"이 한 줄은 다섯 개 전부에 적용합니다. 석 달 뒤에 이 한 줄이 지켜졌는지부터 보고할 겁니다."
발표회 다음 주 월요일. 환경연구부 연구실.
김환경 부장은 지난달 보고서를 출력해 김전산 주무관 앞에 놓았다. 수질 측정 지점 스물네 곳의 월간 결과였다. 앞의 세 쪽은 표였고, 뒤의 다섯 쪽은 해설이었다.
"표는 측정 DB에서 뽑으면 금방이에요. 문제는 뒤의 글입니다. 지점마다 전월보다 올랐는지 내렸는지, 기준을 넘었는지, 넘었으면 몇 번째인지. 그걸 연구원 두 명이 이틀 동안 문장으로 씁니다. 매달 거의 같은 문장을요."
김전산 주무관은 해설을 읽었다. 정말 거의 같은 문장이었다. '전월 대비 상승하였으나 기준 이내임.' '3개월 연속 기준을 초과하여 원인 검토가 필요함.'
"부장님, 이 문장들 중에 연구원이 판단해서 쓰는 부분은 어디입니까?"
김환경 부장은 펜으로 마지막 문단을 짚었다.
"종합 의견. 여기만 진짜 우리 일이에요. 나머지는 숫자를 말로 옮기는 거고."
김전산 주무관은 팀의 원칙을 그대로 설계에 옮겼다.
측정 DB ──▶ 통계 계산(SQL) ──▶ 지점별 숫자 묶음 ──▶ 맥 스튜디오 ──▶ 해설 초안
평균, 전월 대비, (문장만 쓴다) ↓
기준 초과 횟수 연구원 검토·수정
모델은 하나 더 들였다. 코드를 쓰는 데 맞춘 모델 대신, 한국어 문장에 강한 일반 대화용 Qwen8 2.5 32B9를 외부망에서 받아 반입하고, 2번 맥 스튜디오에 올렸다.
2주 뒤. 환경연구부.
첫 초안은 놀라울 만큼 매끄러웠다. 연구원 두 명이 화면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한 사람이 멈췄다.
7번 지점은 전월 대비 BOD가 18% 상승하였으며,
이는 최근 집중 강우에 따른 비점오염원 유입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강우 얘기는 어디서 나온 거예요? 우리 그런 데이터 안 줬는데."
김전산 주무관의 등에 식은땀이 났다. AI는 받은 숫자 외에, 그럴듯한 원인을 스스로 지어 붙였다. 더 무서운 건 그 문장이 실제 연구원이 쓸 법한 문장이었다는 점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보고서에 실렸을 수도 있었다.
두 번째 문제도 있었다. 한 지점에서 기준치를 실제와 다르게 적었다. 기준치는 넘겨주지 않았는데, 모델이 어디선가 배운 값을 끌어온 것이다.
김전산 주무관은 두 가지를 바꿨다.
첫째, 모델에게 주는 당부를 분명히 했다.
- 아래에 준 숫자만 쓴다. 준 적 없는 숫자, 기준치, 날씨, 원인은 쓰지 않는다.
- 원인이 궁금한 대목에는 "원인 검토 필요"라고만 쓴다.
- 종합 의견은 쓰지 않는다.
둘째, 당부만 믿지 않기로 했다. 초안이 나오면 프로그램이 초안 속 숫자를 전부 뽑아 DB에서 넘긴 숫자와 대조한다. 넘긴 적 없는 숫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문장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확인 필요"를 붙인다. 원인을 말하는 표현('영향으로', '때문에', '판단된다')이 나와도 마찬가지로 칠한다.
다음 달 시연에서 노란 문장은 스물네 지점 중 두 개였다. 연구원들은 그 두 문장만 다시 썼다.
"이제 믿고 읽는 게 아니라, 노란 데만 의심하면 되네요." 연구원 한 명이 말했다.
| 항목 | 시범 전 | 시범 후 (2개월 운영) |
|---|---|---|
| 월간 보고서 해설 작성 | 연구원 2명 × 2일 | 연구원 1명 × 반나절 (검토 포함) |
| 보고서에 실린 수치 오류 | 월 1~2건 (옮겨 적기 실수) | 0건 |
| AI가 지어낸 원인·수치 | (해당 없음) | 숫자 대조 검사에서 모두 걸러짐 |
| 종합 의견 | 연구원 | 연구원 (변화 없음) |
한계: 문장이 밋밋하다. 해석은 여전히 연구원의 몫이고, 그래야 한다.
다음 단계: 분기 보고서와 연차 보고서의 반복 문단에 같은 방식을 넓힌다.
김환경 부장은 결과를 보고 한마디만 했다.
"이틀이 반나절이 됐으면, 남은 하루 반은 종합 의견에 쓰라고 하겠습니다."
이조사 부장의 부탁은 단순했다.
"우리 조사원들은 현장에서 태블릿 메모장에 막 적어요. 사무실에 돌아와서 그걸 보고 조사표 화면에 다시 칩니다. 지점, 일시, 날씨, 관찰 내용, 특이사항. 한 장에 25분씩. 하루 열 장이면 오후가 다 갑니다."
그가 보여 준 현장 메모는 이랬다.
오전 10시 반쯤 B-3 지점 도착. 흐리고 바람 셈.
하천 폭 대략 12m, 수위 평소보다 높음.
왜가리 2, 쇠백로 1. 하류 쪽 거품 약간 보임 → 사진 3장
B-4는 진입로 공사 중이라 못 들어감
이코딩 주무관이 웃었다. 차량 예약 시스템을 만들 때 이 부서의 일정을 지겹도록 들었던 그였다.
"부장님, 이 메모를 붙여 넣으면 조사표 칸이 채워지게 해 보겠습니다. 대신 채운 칸은 조사원이 반드시 확인하고 저장하게요."
첫 시연에서 조사원이 물었다.
"B-4는 못 들어갔다고 적었는데, 왜 조사표가 두 장 생겼어요? 그리고 B-4 날씨는 왜 '맑음'이에요?"
AI는 메모에 나온 B-4를 별도의 조사 지점으로 만들었고, 비어 있는 날씨 칸을 그럴듯하게 채워 넣었다. 빈칸을 두는 대신 지어낸 것이다.
또 하나. '왜가리 2'를 '왜가리 2마리'로 잘 옮겼지만, 다른 메모의 '2'는 개체 수가 아니라 사진 번호였다.
이코딩 주무관은 규칙을 세 줄로 줄였다.
- 메모에 없는 값은 채우지 않고 비워 둔다.
- 조사를 못 한 지점은 조사표를 만들지 않고 '특이사항'에만 적는다.
- 숫자가 무엇을 세는지 확실하지 않으면 그 칸을 '확인 필요'로 표시한다.
화면도 바꿨다. AI가 비워 둔 칸과 '확인 필요' 칸은 노란색으로 칠해, 그 칸을 직접 입력하거나 확인 버튼을 눌러야만 저장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 시연에서 조사원은 노란 칸 세 개만 채우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걸린 시간은 6분이었다.
| 항목 | 시범 전 | 시범 후 (조사원 8명, 6주 운영) |
|---|---|---|
| 조사표 한 장 입력 | 약 25분 | 약 7분 (확인 포함) |
| 빠진 항목으로 반려된 조사표 | 주 5~6건 | 주 1건 이하 (빈칸이 노랗게 보이므로) |
| AI가 지어 넣은 값 | (해당 없음) | 규칙 변경 후 저장 단계에서 0건 |
한계: 손글씨 사진과 음성 메모는 다루지 못한다. 메모를 대충 쓰면 노란 칸이 늘어난다.
다음 단계: 조사표 서식이 다른 계절 조사와 생물 조사로 넓힌다.
이조사 부장이 조사원들에게 한 말이 부서 게시판에 붙었다.
"노란 칸이 많으면 AI 탓이 아니라 메모 탓입니다."
박데이터 연구관의 고민은 정시스템 주무관이 이미 알고 있었다. 연구과제 현황 대시보드10를 만든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대시보드는 정해 둔 질문에만 답하잖아요." 박데이터 연구관이 말했다. "그런데 소장님은 매번 새로운 걸 물으세요. '올해 과제 중에 집행률 50% 안 되는 거, 책임자별로.' 그러면 저는 정 주무관한테 전화하고, 정 주무관은 SQL 짜고, 반나절이 갑니다."
정시스템 주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여덟 번은 받는 전화였다.
"말로 물으면 SQL을 만들어서 결과를 보여 주는 화면을 만들어 보죠. Continue로 매일 하는 일이니까, 머리는 이미 있습니다."
정시스템 주무관은 시연 전에 시험 질문 서른 개를 만들었다. 대시보드로 정답을 알고 있는 질문들이었다.
결과는 열아홉 개 정답. 틀린 열한 개가 문제였다. 오류가 나서 멈춘 게 아니라, 그럴듯한 숫자를 내놓고 틀렸다.
박데이터 연구관이 화면을 오래 보았다.
"오류 메시지가 나왔으면 차라리 나았겠어요. 이 숫자를 소장님께 그대로 드렸으면……"
정시스템 주무관은 AI를 고치는 대신, AI가 보는 세상을 좁혔다.
첫째, 원본 테이블 대신 정리된 표를 보여 준다. 과제, 책임자, 배정액, 집행액, 집행률을 미리 한 줄로 정리한 표(DB의 뷰)를 만들고, AI는 그 표만 볼 수 있게 했다. 중복이 생길 잇기 자체가 없어졌다.
둘째, 연구소의 말을 사전으로 준다.
- "올해" = 회계연도 (1월 1일 ~ 12월 31일)
- "집행률" = 집행액 ÷ 배정액 × 100
- "책임자" = 연구책임자 (공동연구원 제외)
셋째, 한 번 검증된 질문은 버튼이 된다. 박데이터 연구관이 결과를 확인하고 '검증' 버튼을 누르면, 그 질문과 SQL이 저장되어 다음부터는 AI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실행된다. 새 질문만 AI가 만들고, 새 질문의 결과에는 "검증 전" 표시가 붙는다.
같은 시험 질문 서른 개로 다시 쟀다. 스물여덟 개 정답. 틀린 두 개는 "검증 전" 표시를 단 채로 박데이터 연구관에게 걸렸다.
| 항목 | 시범 전 | 시범 후 (3개월) |
|---|---|---|
| 정보시스템팀에 오는 수시 SQL 요청 | 주 8건 안팎 | 주 2건 안팎 |
| 시험 질문 30개 정답 | 19개 (첫 시연) | 28개 (개선 후) |
| 검증된 질문 버튼 | 0개 | 41개 |
| 소장 보고 전 사람 확인 | 정시스템 주무관 | 박데이터 연구관 (SQL을 같이 봄) |
한계: 처음 보는 유형의 질문은 여전히 틀릴 수 있다. 그래서 "검증 전" 결과는 보고서에 그대로 쓰지 않는다.
다음 단계: 두 달 전 운영회의 직전에 밤새 뽑았던 연구비 집행 현황도 검증된 질문 묶음으로 만든다.
박데이터 연구관은 결과 보고서 맨 끝에 한 줄을 직접 적었다.
"AI가 SQL을 짜 주는 것보다, SQL을 같이 보게 된 게 더 큰 변화였습니다."
연구지원부 한지원 과장의 책상 전화는 시범 사업 회의 중에도 두 번 울렸다.
"회의비로 커피 사도 되나요. 해외 출장 일비는 얼마예요. 공동연구원 인건비는 몇 퍼센트까지 되나요. 하루에 서른 통이에요. 답은 다 규정집에 있어요. 규정집이 다섯 권이라 아무도 안 읽을 뿐이죠."
박개발 사무관이 웃었다. 그도 출장비 정산 때마다 그 전화를 거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과장님, 규정집을 맥 스튜디오에 읽혀 두고, 연구원들이 먼저 거기에 물어보게 하죠. 답에는 반드시 몇 조 몇 항인지 붙이게 하고요."
이번에는 화면을 새로 만들지 않았다. 웹에서 대화하는 Open WebUI13를 연구소 안에 설치하고, 문서 검색 기능에 규정 문서를 넣었다. 연구원이 질문하면 규정 문서에서 관련 대목을 찾아 그 대목을 근거로 답한다.
시범 둘째 주, 한 연구원이 한지원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AI가 회의비 1인 한도가 이렇다고 해서 그렇게 썼는데, 반려됐어요."
박개발 사무관이 확인해 보니, 규정 문서를 넣을 때 개정 전 지침과 개정 후 지침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 AI는 근거를 잘 붙였다. 다만 작년 지침의 조항을 근거로 붙였다. 조항 번호까지 정확했기 때문에 연구원은 의심하지 않았다.
"근거를 붙였는데도 틀릴 수 있네요." 한지원 과장이 말했다.
"근거가 틀렸던 게 아니라, 근거로 쓸 책을 우리가 잘못 꽂아 둔 겁니다." 박개발 사무관이 답했다.
박개발 사무관은 이 시범 사업의 핵심이 AI가 아니라 서가 관리라는 걸 깨달았다.
석 달째, 서가에는 규정 다섯 권과 FAQ 한 권이 꽂혀 있었다. FAQ는 연구원들의 질문으로 매주 두꺼워졌다.
| 항목 | 시범 전 | 시범 후 (연구원 60명, 10주) |
|---|---|---|
| 연구지원부 규정 문의 전화 | 하루 약 30통 | 하루 약 12통 |
| 남은 전화의 성격 | 규정 찾기가 대부분 | 판단이 필요한 예외가 대부분 |
| 옛 규정을 근거로 한 오답 | 시범 2주차 3건 | 서가 정리 뒤 0건 |
| "연구지원부 확인 필요" 답 | (해당 없음) | 주 15건 안팎 → FAQ로 흡수 중 |
한계: 규정의 해석이 갈리는 질문은 AI가 답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 서가 관리를 소홀히 하면 바로 틀린다.
다음 단계: 연구장비 구매 규정과 보안 규정으로 서가를 넓힌다.
한지원 과장은 결과를 이렇게 말했다.
"전화가 줄어서 좋은 게 아니에요. 쉬운 전화가 줄어서, 어려운 전화에 시간을 쓸 수 있게 된 게 좋은 거예요."
공동장비실 윤장비 연구사는 정운영 주무관을 장비 앞으로 데려갔다. 15년 된 분석 장비. 그 옆의 제어용 PC는 아직 오래된 운영체제로 돌고 있었고, 화면에는 알 수 없는 오류 코드가 떠 있었다.
"이게 뜨면 매뉴얼을 뒤져요. 영어로 800쪽. 그것도 같은 회사 장비 세 모델이 한 권에 섞여 있어요. 못 찾으면 업체에 연락하는데, 기술자가 오는 데 2주 걸립니다. 그동안 시료가 쌓이고요."
정운영 주무관은 장비 쪽 일을 맡은 지 오래였다. 젠킨스14가 첫 초록불을 켠 날의 회식 자리에서 "연구장비 쪽도 SVN15에 올리면" 하고 말을 꺼냈던 그였다.
"연구사님, 오류 로그랑 매뉴얼을 같이 읽혀서, 어디를 봐야 하는지부터 알려 주게 해 보겠습니다."
정운영 주무관은 처음부터 선을 하나 그었다.
AI는 '무엇을 확인할지'와 '매뉴얼 몇 쪽인지'까지만 말한다.
장비 설정을 바꾸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조작은 사람이 매뉴얼 원문을 보고 한다.
첫 주는 순조로웠다. 오류 코드 세 건의 원인을 매뉴얼 쪽수와 함께 찾아냈다. 윤장비 연구사는 "업체에 전화할 필요가 없었다"며 기뻐했다.
둘째 주에 문제가 생겼다. 한 오류에 대해 AI가 "오븐 온도 상한을 조정하라"는 조치를 제시했다. 확인해 보니 그 대목은 같은 회사의 다른 모델 매뉴얼에서 온 것이었다. 처음 매뉴얼을 나눌 때, 공통 부록이 모델마다 중복으로 들어간 탓이었다. 그리고 조치를 말하지 말라는 선을 넘었다.
윤장비 연구사는 그 조치를 따르지 않았다. 매뉴얼 원문을 펴 보고 모델명이 다르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제가 안 봤으면 장비 한 대 날릴 뻔했네요."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
정운영 주무관은 그날 밤 세 가지를 고쳤다.
그리고 하나를 더 했다. 장비 담당 선생님들이 USB로 들고 다니던 장비 연계 프로그램 소스를 SVN에 올리고, 젠킨스로 빌드16했다. 그 회식 자리에서 꺼냈던 이야기를 결국 해냈다.
| 항목 | 시범 전 | 시범 후 (장비 4종, 3개월) |
|---|---|---|
| 오류 원인 파악까지 | 평균 반나절 이상 | 평균 1시간 안팎 |
| 업체 기술자 출장 요청 | 분기 6건 | 분기 2건 |
| AI가 조치를 직접 제시한 경우 | 시범 2주차 1건 | 걸러 내기 적용 뒤 0건 |
| 장비 연계 프로그램 소스 | USB 3개에 흩어짐 | SVN 한곳, 젠킨스 빌드 |
한계: 매뉴얼에 없는 고장은 모른다. 장비를 실제로 만지는 판단은 끝까지 사람이 한다.
다음 단계: 다른 장비 6종의 매뉴얼을 모델별로 정리해 넣는다. 정리 작업은 장비실과 함께 한다.
윤장비 연구사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AI가 고쳐 준 건 하나도 없습니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알려 줬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2주를 하루로 줄였습니다."
다음 분기 운영회의. 목요일 오전 10시. 본관 대회의실.
같은 방이었다. 이번에는 정보시스템팀 여섯 명 말고도, 다섯 부서의 담당자들이 뒷줄에 함께 앉았다. 김환경 부장 옆에는 보고서를 쓰던 연구원이, 이조사 부장 옆에는 노란 칸을 채우던 조사원이 있었다.
최정보 팀장이 단상에 올랐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석 달 전에 다섯 가지를 맡았습니다. 다섯 가지 모두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된 것과 안 된 것을 같이 보고드리겠습니다."
첫 화면은 다섯 줄의 표였다.
| 부서 | 시범 사업 | 가장 큰 변화 |
|---|---|---|
| 환경연구부 | 측정 결과 보고서 초안 | 해설 작성 2일 → 반나절, 수치 오류 0건 |
| 조사연구부 | 현장조사 기록 정리 | 조사표 한 장 25분 → 7분 |
| 데이터연구부 | 말로 묻는 과제 현황 | 수시 SQL 요청 주 8건 → 2건 |
| 연구지원부 | 연구비 규정 길잡이 | 규정 문의 전화 하루 30통 → 12통 |
| 공동장비실 | 장비 오류 로그 해석 | 원인 파악 반나절 → 1시간 |
"다섯 개 모두, 장비는 처음의 맥 스튜디오 세 대였습니다. 모델 하나를 더 반입했을 뿐, 장비는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섯 개 모두, 연구소 밖으로 나간 자료는 없습니다."
두 번째 화면은 더 길었다. 팀장은 이 화면에서 더 오래 머물렀다.
1. AI는 그럴듯하게 틀린다
- 지어낸 원인(환경연구부), 지어낸 날씨(조사연구부),
부풀린 집행액(데이터연구부), 작년 규정(연구지원부),
다른 모델의 조치(공동장비실)
- 다섯 개 모두 첫 시연에서 한 번씩 틀렸다
2. 그래서 사람이 확인하는 장치를 먼저 만들었다
- 숫자 대조 검사, 노란 칸, 검증된 질문, 시행일 표시, 조치 문장 걸러 내기
3. 장비가 붐비기 시작했다
- 다섯 부서가 함께 쓰자 오후 2시의 줄이 다시 생겼다
4. 문서를 관리하는 일은 줄지 않았다
- 규정집과 매뉴얼을 최신으로 유지하는 일은 부서의 몫으로 남는다
"이 화면을 보고 불안하실 수 있습니다." 팀장이 말했다. "그런데 저희는 이 화면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다섯 번 틀렸고, 다섯 번 모두 사람이 잡았습니다. 석 달 전 수첩에 적은 한 줄이 지켜졌다는 뜻입니다."
화면에 그 한 줄이 떴다.
숫자는 시스템이, 문장은 AI가, 판단은 사람이.
연구소장은 한참 표를 보다가, 뒷줄의 연구원과 조사원 쪽을 보았다.
"현장에서 쓰신 분들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환경 부장 옆의 연구원이 일어섰다.
"노란 문장만 의심하면 되니까, 처음으로 보고서 쓰는 날 퇴근을 제때 했습니다."
조사원이 이어 말했다.
"노란 칸이 귀찮을 때도 있는데, 그게 없으면 이제 불안할 것 같습니다."
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결정을 읽었다.
1. 다섯 개 시범 사업은 다음 달부터 정식 운영으로 전환한다.
2. 부서마다 AI 담당자 1명을 지정하고, 정보시스템팀이 교육한다.
3. 내년 본예산에 맥 스튜디오 추가 2대를 반영한다.
4. 같은 예산에 개발기 1대를 반영한다. 메모리 값이 어떻게 되든.
마지막 줄에서 뒷줄이 술렁였다. 김전산 주무관은 고개를 들었다. 1억 3천만 원 견적서를 접던 날이 떠올랐다.
옆자리의 박개발 사무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말은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부서장들이 최정보 팀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우리 부서도 됩니까?" "보안성 검토는 어떻게 받으셨어요?" "모델은 뭘로 골라야 합니까?" "개인정보가 들어간 문서는요?" "맥 스튜디오 말고 다른 장비는 안 됩니까?"
팀장은 하나하나 답하다가, 김전산 주무관을 돌아보았다.
"김 주무관, 이 질문들 전부 적어 두세요. 다음 주부터 부서 담당자 교육을 시작하면, 같은 질문을 백 번은 더 받을 겁니다."
김전산 주무관은 수첩을 새로 폈다. 첫 장 맨 위에 이렇게 적었다.
자주 묻는 질문
석 달 전, 다섯 개의 하소연이었던 것이 다섯 개의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시, 수십 개의 질문이 되어 정보시스템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끝.
COMMENTS · 제3편
다섯 개의 시범 사업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나 보탤 내용을 남겨 주세요.